본문 바로가기
마음의 등불 Lamp Life/뿌리깊은나무

금강경에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상을 짓는다는 의미

by 뿌리깊은나무N 2020. 11. 21.
반응형

▷ 석가의 큰 가르침이 깃든 금강경에서 상을 짓는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통하여 상(相)을 쉽게 이해하기!

법륜스님의 금강경 '상을 짓는다' 즉문즉설 중에서

금강경을 읽다 보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라는 개념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산스크리트어 안웃따라쌈약쌍보디(anuttarā samyak-saṃbodhi)를 음차한 말로 '위없이 올바른 깨달음으로 향하는 마음'을 뜻한다. 석가모니는 금강경에서 이러한 마음을 내기 위해서는 '겉모습이나 현상 및 관념의 덧없음을 알아, 이들에 현혹되지 않은 채로 올바르게 관찰해서 깨달음을 향하는 순수한 마음을 내야'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사실상 이 부분을 금강경의 핵심 주제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금강경은 당시 인도에서 유행하던 4가지 철학적 관념을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는 이름으로 칭하며 비판하고 있다. 각각에 대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 '나'를 불변한 실체로 보는 관념(아상)
• 인간은 다른 축생과 다르며, 만물위에 군림한다는 관념(인상
• 중생과 부처를 구분하여 스스로를 포기하는 관념(중생상
• 일정한 목숨이란것이 존재한다 하는 관념(수자상)

- 금강경의 핵심주제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관점 출처 : 나무위키

금강경의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의미가 단순히 아트만 자성 중생 영혼에 대한 상을 뜻하는 의미가 아닌,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을 뜻하는 의미이다.


법륜스님의 즉문즉설로 쉽고 빠르게 이해하는 금강경의 '상을 짓는다'는 의미!


“금강경에서 일체의 상(相)을 버리라고 했는데, 무슨 의미인지 궁금합니다.”

“상(相)이란 주관을 객관화시킨 것을 뜻합니다. 여기 컵과 뚜껑이 있습니다.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큽니까?”

“컵이요”

“그럼 뚜껑은 컵보다 커요? 작아요?”

“작습니다”

“그럼, 지금 질문자에게 뚜껑은 컵보다 작다고 인식이 된 겁니다. 그렇다면 이 시계와 뚜껑은 어느 게 더 커요?”

“뚜껑이 더 큽니다”

“그럼, 여기서는 질문자에게 뚜껑은 시계보다 크다고 인식이 된 겁니다. 첫 번째 조건에서는 뚜껑이 작다고 인식이 되었고, 두 번째 조건에서는 뚜껑이 크다고 인식이 된 거예요. 그렇다면 이 뚜껑은 큰 것입니까? 작은 것입니까?”

“크다고도 할 수 없고, 작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예. 뚜껑의 크기는 인연 따라 크다, 작다라고 불릴 뿐이지 뚜껑 자체가 크다 작다고 할 수 없습니다. 컵 뚜껑은 작은 것도 아니고 큰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컵과 뚜껑을 오랫동안 인식하다 보면 비교 대상이 없어도 컵은 큰 것이 되고 뚜껑은 작은 것이 되어 버립니다. 이때 크다 작다는 표현은 객관적 존재를 표현한 겁니까? 내가 인식한 것을 표현한 겁니까?”

“내가 인식한 것을 표현한 겁니다”

“인식한 것을 표현한 것을 ‘주관’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뚜껑은 크다고도 할 수 없고, 작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뚜껑은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객관적으로 인식했다고 착각하고 뚜껑이라는 존재 자체가 작다고 주장합니다. 이럴 때 ‘상(相)을 지었다’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겠습니다. ‘내가 보기에 저 남자가 나쁜 사람이다’ 이렇게 말할 때는 나의 주관이라는 전제가 깔려있지만 ‘저 남자는 나쁜 사람이야’라고 말할 때는 ‘그 남자 자체가 나쁜 사람이다’라는 뜻이 됩니다. 이런 것이 바로 주관을 객관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일러 상(相)을 지었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상(相)을 짓는다는 것은 인식의 오류를 범할 때를 말하는 것이네요.”

“네. 상황이나 조건에 따라 인식이 다르게 되는 것인데, 동일한 상황이 지속되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 존재 자체가 크거나 작다고 착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절대화시키고 객관화시킨 겁니다. 어떤 사람의 행동을 보고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라고 한다면 그건 상(相)을 지은 겁니다.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는 내가 본 한 가지 행동만으로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 자체가 나쁘다고 객관화시켰기 때문에 ‘저 남자는 나쁜 사람이다’라고 주장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라고 표현하는 것은 주관을 주관인 줄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상(相)을 지은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주관을 주관인 줄 알면 다른 사람이 ‘나는 그 남자 좋아 보이던데’라고 하면 ‘그래, 너와 나는 사람을 보는 눈이 다르구나!’라고 금방 수긍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와도 갈등이 생기지 않아요.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스님이 된 건 상을 여의고 괴로움 없는 삶을 살려고 출가한 것이잖아요. 그런데 ‘내가 스님이다’ 하는 상(相)을 짓게 되면 괴로움이 오히려 더 많아집니다. 왜냐하면 상을 짓게 되면 ‘감히 스님한테’ 하면서 합리적이지 못하고 비민주적인 잣대를 들이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엄마가 아이에게 ‘감히 엄마한테’라고 하고, 남편이 부인에게 ‘감히 남편한테’라고 하고, 선생님이 학생에게 ‘감히 선생님한테’ 하는 것과 하등 다를 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스님이라는, 엄마라는, 남편이라는, 선생님이라는 상을 지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항상 상(相)을 짓고 삽니다. 그래서 괴롭지 않는 삶을 살려면 내가 상(相)을 짓는 순간 ‘아, 내가 상을 지었구나!’ 하고 알아차려서 바로 상을 여의는 게 필요합니다.”

 

隨 (따를 수)   緣 (인연 연)   成 (이룰 성) 수연성 카톡 프로필 메인 이미지 제작 - 그린비스토리

그 어떤 '상'에도 집착하지 않는 '중도'의 진리


'무유정법’이란 인연을 따라서는 만 가지 길이 나올 수도 있다는 뜻이에요. 그 인연을 따라서 가야지 그냥 만 가지 방향으로 아무렇게나 가면 안돼요. 예를 들어 늘 옷을 입어야 됩니까, 벗어야 됩니까? 그중에 어느 하나라고 말할 수 없어요. 옷은 입어야 된다고 말할 수도 없고, 벗어야 된다고 말할 수도 없는 거죠.

목욕탕 안에서는 벗어야지요. 밖에서는 입어야 되지요. 그런데 그것도 또 세세하게 들어가면 딱 안 맞아요. 인도 여자들은 목욕탕 안에서도 옷을 입거든요. 어릴 때부터 평생 옷을 입고 목욕을 합니다

이런 것을 두고 ‘인연을 따른다’고 말하는 거예요. 이걸 법성계에서는 ‘불수자성 수연성(不守自性 隨緣成)’이라고 합니다. ‘불수자성(不守自性)’, ‘스스로의 성품을 지키지 아니하고’, 다시 말해서 ‘크다, 작다, 동쪽이다, 서쪽이다, 하는 것을 지키지 아니하고’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공(空)하다. 정한 바가 없다’는 뜻입니다.

‘수연성(隨緣成)’, 즉 ‘인연을 따라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이걸 반야심경에서는 ‘공즉시색(空卽是色)’을 말합니다. ‘동쪽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인연을 따라 동쪽이라 이름 할 수 있다’는 건 금강경 식 표현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사상(四相), 즉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子相)이 뭐냐?’ 하는 것은 지식에 속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그 네 가지가 본질이 아니고, 또 그 네 가지는 학자에 따라 규정하는 방식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울타리를 작게 치든, 크게 치든 ‘울타리를 친다, 모양을 짓는다’는 것이에요. 어떻게 울타리를 치든, 아상을 치든, 중생상을 치든, 수자상으로 치든, 울타리를 치면 그건 이미 보살이 아니니 그 네 가지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거예요.

출처 : 정토회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隨 (따를 수)   緣 (인연 연)   成 (이룰 성) 수연성 카톡 프로필 프사 배경 이미지 제작 - 그린비스토리

불수자성 수연성으로 제작된 카톡 프사 배경 사진으로 사용 시 이미지 하단 "그린비스토리" 워터마크 임의 변경 및 훼손 금지 합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