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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당신 생각을 켜놓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함민복 시 모음)

by 뿌리깊은나무N 2023.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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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이라는 짧은 시로 사랑과 그리움을 표현한 함민복 시
 
1962년 충북 중원군 노은면에서 태어났다.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 졸업, 서울예전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2학년 때인 1988년 <세계의 문학>에 「성선설」 등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1990년 첫 시집 『우울씨의 일일』을 펴내고, 의사소통 부재의 현실에서 「잡념」의 밀폐된 공간 속에 은거하고 있는 현대인의 소외된 삶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함민복은 자본과 욕망의 시대에 저만치 동떨어져 살아가는 전업 시인으로써, 개인의 소외와 자본주의의 폭력성을 특유의 감성적 문체로 써내려간 시로 호평받은 그는, 인간미와 진솔함이 살아 있는 에세이로도 널리 사랑 받고 있다.
 
자료 인용: YES24
 
 

당신생갹 이미지 함민복 시 모음


함민복 시인의 작품은 가난과 관련된 시가 많다. "가난에 대해 열등감을 느낀 적은 없느냐"고 어느 기자가 물었을 때 그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가난하다는 게 결국은 부족하다는 거고, 부족하다는 건 뭔가 원한다는 건데, 난 사실 원하는 게 별로 없어요. 이 집도 언제 비워줘야 할지 모르지만 빈집이 수두룩한데 뭐. 자본주의적 삶이란 돈만큼 확장된다는 것을 처절하게 체험했지만 굳이, 확장 안 시켜도 된다고 생각해요. 늘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해요.
 
함민복의 시 ‘가을’ 은 사랑하는 이를 향한 애절한 그리움을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다.  

많은 이들로 부터 기억속에 잊혀지지 않는 좋은 시 구절 중 하나라고 할 수있다.

 
 
 
가을
- 함민복
 
당신 생각을 켜놓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창작과비평사] 1996년 10월 10일
 
 



 
쑥부쟁이 – 추석

 
지난 일 생각 좀 해 보라고 덜컹덜컹 온몸 흔들어 주누나
비포장도로흙먼지 날리며 고향에 갔었나니
 
아버지 묘보다 잔디 무성한 형의 묘에서 쑥부쟁이 뽑아낼 제
실핏줄 같은 가난의 뿌리 자꾸 끊어지더이다
 
왜가리 떼처럼 떠나고 싶어 떠난 것이 아닌 살붙이들 모여
버짐 피던 이야기검정고무신 하나로 술을 따라 마셨지요.
 
여선생 호루라기 소리에 앞으로나란히 피어난 코스모스 밤길
밤엔 향기로운 아름다운 꽃들아너희들도 고향으로 돌아갈지니
 
바람 불 때마다 스스로의 가시에 찔리며 붉게 익은 대추나무에
아버지 얼굴로 걸린 달달그림자로 길게 다리 펴 보았던 영혼아
 
그날 밤 내가 흘린 눈물에 흙가슴 다 적셔주던 고향을 보았는감
그날 밤 내가 눈물 추스를 때 굽은 등 품어주던 산그림자 보았는감
 
쑥부쟁이야
쑤부쟁이야

 


 
고백

여름 장날에 빈혈로 쓰러져
남도 땅 친구 방에서 병원 다닐 때

닭 한 마리 사다가
잔털 뽑으며
물로 씻다가

살을 만지고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어
죽은 닭의 살이지만
살을 만지고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어

내가 만져 본 살도
나를 만져 준 살도

까마득
오래 되어

죄스럽게
죄스럽게

배 눌러보는 여의사 님의 손끝을
아픈 배로 숨으로 그윽이 만져 보았습니다
 


 
공터의 마음

내 살고 있는 곳에 공터가 있어
비가 오고, 토마토가 왔다 가고
서리가 오고, 고등어가 왔다 가고
눈이 오고, 번개탄이 왔다 가고
꽃소식이 오고, 물미역이 왔다 가고

당신이 살고 있는 내 마음에도 공터가 있어

당신 눈동자가 되어 바라보던 서해바다가 출렁이고
당신에게 이름 일러주던 명아주, 개여뀌, 가막사리, 들풀이 푸르고
수목원, 도봉산이 간간이 마음에 단풍들어
아직은 만선된 당신 그리움에 그래도 살 만하니

세월아 지금 이 공터의 마음 헐지 말아다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서
담장을 보았다
집 안과 밖의 경계인 담장에
화분이 있고
꽃의 전생과 내생 사이에 국화가 피었다

저 꽃은 왜 흙의 공중섬에 피어 있을까
해안가 철책에 초병의 귀로 매달린 돌처럼
도둑의 침입을 경보하기 위한 장치인가
내 것과 내 것 아님의 경계를 나눈 자가

행인들에게 시위하는 완곡한 깃발인가
집의 안과 밖이 꽃의 향기를 흠향하려
건배하는 순간인가

눈물이 메말라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지 못하는 날
꽃철책이 시들고
나와 세계의 모든 경계가 무너지리라
 
 


 
달과 설중매

 
당신 그리는 마음 그림자
아무 곳에나 내릴 수 없어
눈 위에 피었습니다
 
꽃피라고
마음 흔들어 주었으니
당신인가요
 
흔들리는
마음마저 보여주었으니
사랑인가요
 
보세요
제 향기도 당신 닮아
둥그렇게 휘었습니다

 
 


 


당신 품에 안겼다가 떠나갑니다
진달래꽃 술렁술렁 배웅합니다
앞서 흐르는 물소리로 길을 열며
사람들 마을로 돌아갑니다

살아가면서
늙어가면서
삶에 지치면 먼발치로 당신을 바라다보고
그래도 그리우면 당신 찾아가 품에 안겨보지요

그렇게 살다가 영, 당신을 볼 수 없게 되는 날
당신 품에 안겨 당신이 될 수 있겠지요
 
 


 
긍정적인 밥
 
詩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 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 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길의 길

길 위에 길이 가득 고여 있다
지나간 사람들이
놓고 간 길들
그 길에 젖어 또 한사람 지나간다
길도 길을 간다
제자리걸음으로
제 몸길을 통해
더 넓고 탄탄한 길로
길이 아니었던 시절로

가다가

문득
터널 귓바퀴 세우고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의 소리 듣는다
 


 
봄꽃

꽃에게로 다가가면
부드러움에
찔려

삐거나 부은 마음
금세

환해지고
선해지니

봄엔
아무
꽃침이라도 맞고 볼 일
 


 
선천성 그리움

 
사람 그리워 당신을 품에 안았더니
당신의 심장은 나의 오른쪽 가슴에서 뛰고
끝내 심장을 포갤 수 없는
우리 선천성 그리움이여
하늘과 땅 사이를
날아오르는 새떼여
내리치는 번개여
 


 
반성
 

강아지 만지고
손을 씼었다

내일부터는
손을 씻고
강아지를 만져야지
 


 
양팔저울

나는 나를 보태기도 하고 덜기도 하며
당신을 읽어 나아갑니다

나는 당신을 통해 나를 읽을 수 있기를 기다리며
당신 쪽으로 기울었다가 내 쪽으로 기울기도 합니다

상대를 향한 집중, 끝에, 평형
실제 든 짐은 없으나 서로 짐 덜어 가벼워지는
 


만찬

혼자 사는 게 안쓰럽다고

반찬이 강을 건너왔네
당신 마음이 그릇이 되어
햇살처럼 강을 건너왔네

김치보다 먼저 익은
당신 마음
한 상

마음이 마음을 먹는 저녁
 


 
 
그날 나는 슬픔도 배불렀다

아래층에서 물 틀면 단수가 되는
좁은 계단을 올라야 하는 전세방에서
만학을 하는 나의 등록금을 위해
사글셋방으로 이사를 떠나는 형님네
달그락거리던 밥그릇들
베니어판으로 된 농짝을 리어카로 나르고
집안 형편을 적나라하게 까 보이던 이삿짐
가슴이 한참 덜컹거리고 이사가 끝났다
형은 시장 골목에서 자장면을 시켜 주고
쉽게 정리될 살림살이를 정리하러 갔다
나는 전날 친구들과 깡소주를 마신 대가로
냉수 한 대접으로 조갈증을 풀면서
자장면을 앞에 놓고
이상한 중국집 젊은 부부를 보았다
바쁜 점심시간 맞춰 잠 자 주는 아기를 고마워하며
젊은 부부는 밀가루, 그 연약한 반죽으로
튼튼한 미래를 꿈꾸듯 명랑하게 전화를 받고
서둘러 배달을 나갔다
나는 그 모습이 눈물처럼 아름다워
물배가 부른데도 자장면을 남기기 미안하여
마지막 면발까지 다 먹고 나니
더부룩하게 배가 불렀다, 살아간다는 게

그날 나는 분명 슬픔도 배불렀다
 


 
라면을 먹는 아침

프로 가난자인 거지 앞에서
나의 가난을 자랑하기엔
나의 가난이 너무 가난하지만
신문지를 쫙 펼쳐놓고
더 많은 국물을 위해 소금을 풀어
라면을 먹는 아침
반찬이 노란 단무지 하나인 것 같지만
나의 식탁은 풍성하다
두루치기 일색인 정치면의 양념으로
팔팔 끓인 스포츠면 찌개에
밑반찬으로
씀바귀 맛 나는 상계동 철거 주민들의
눈물로 즉석 동치미를 담그면
매운 고추가 동동 뜬다 거기다가
똥누고 나니까 날아갈 것 같다는
변비약 아락실 아침 광고하는 여자의
젓가락처럼 쫙 벌린 허벅지를
자린고비로 쳐다보기까지 하면
나의 반찬은 너무 풍성해
신문지을 깔고 라면을 먹는 아침이면
매일 상다리가 부러진다.
 


 
달의 눈물

금호동 산동네의 밤이 깊다
고단한 하루를 마친 사람들이
노루들의 잠자리나 되었을 법한
산속으로 머리를 눕히러 찾아드는 곳
힘들여 올라왔던 길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몸 더럽히고
흘러내리는 하수도 물소리
숨찬 산중턱에 살고 있는 나보다
더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 많아
아직 잠 못 이룬 사람들 많아
하수도 물소리
골목길 따라 흘러내린다
전봇대 굵기만한 도랑을 덮은
쇠철망 틈새로 들려오는
하수도 물소리
누가 때늦은 목욕을 했는지
제법 소리가 커지기도 하며
산동네의 삶처럼 경사가 져
썩은내 풍길 새도 없이 흘러내리는
하수도 물소리

또 비린내가 좀 나면 어떠랴
그게 사람 살아가는 증표일진대
이곳 삶의 동맥처럼
새벽까지 끊기지 않고
흐르는
하수도 물소리
물소리 듣는 것은 즐겁다

쇠철망 앞에 쭈그려 앉아 담배를 물면
달의 눈물
하수도 물소리에 가슴이 젖는다

그 날 나는 슬픔도 배불렀다
아래층에서 물 틀면 단수가 되는
좁은 계단을 올라야 하는 전세방에서
만학을 하는 나의 등록금을 위해
사글세방으로 이사를 떠나는 형님네
달그락거리던 밥그릇들
베니어판으로 된 농짝을 리어커로 나르고
집안 형편을 적나라하게 까보이던 이삿집
가슴이 한참 덜컹거리고 이사가 끝났다.
형은 시장 골목에서 짜장면을 시켜주고
쉽게 정리될 살림살이를 정리하러 갔다.
나는 전날 친구들과 깡소주를 마신 대가로
냉수 한 대접으로 조갈증을 풀면서
짜장면을 앞에 놓고
이상한 중국집 젊은 부부를 보았다.
바쁜 점심시간 맞춰 잠 자주는 아기를 고마워하며
젊은 부부는 밀가루, 그 연약한 반죽으로
튼튼한 미래를 꿈꾸듯 명랑하게 전화를 받고
서둘러 배달을 나아갔다
나는 그 모습이 눈물처럼 아름다워
물배가 부른데도 짜장면을 남기기 미안하여
마지막 면발까지 다 먹고나니
더부룩하게 배가 불렀다, 살아간다는 게
그날 나는 분명 슬픔도 배불렀다
 


 
빨래집게

옷을 집고 있지 않을 때
내 몸을 매달아본다
몸뚱이가 되어 허공을 입고
허공을 걷던 옷가지들
떨어지던 물방울의 시간
입아귀 근력이 떨어진
입 다무는 일이 일생인
나를 물고 있는 허공
물 수 없는
시간을 깨물다
철사 근육이 삭아 끊어지면
툭, 그 한마디 내지르고
훑어지고 말
온몸이 입인
 


 
 
오래된 잠버릇
 
파리는 내가 덮고 자는 공간을 깔고 잔다
날개 휘젓던 공간밖에 믿을게 없어
날개의 길밖에 믿을 게 없어
천장에 매달려 잠자는 파리는 슬프다
추락하다 잠이 깨면 곧 비행할 포즈
헬리콥터처럼 활주로 없이 이착륙하는 파리
구더기를 본 사람은 알리라
왜 파리가 높은 곳에서 잠드는가를

저 사내는 내가 덮고 자는 공간을 깔고 잔다
지구의 밑 부분에 집이 매달리는 시간
나는 바닥에 엎드려 자는데
저 사내는 천장에 등을 붙이고 잔다
발 붙이고 사는 땅밖에 믿을 게 없다는 듯
중력밖에 믿을 게 없다는 듯
천장에 등을 붙이고 잠드는 저 사내는 슬프다
어떤 날은 저 사내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늦게 거꾸로 쭈그려 앉아 전화를 걸기도 한다
저 사내처럼 외로운 사람이 어디 또 있나 보다
 



눈물은 왜 짠가
 
지난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 댁에 모셔다 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 시간도 있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설렁탕 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중략..
그러자 주인아저씨는 우리 모자가 미안한 마음 안 느끼게 조심, 다가와 성냥갑만 한 깍두기 한 접시를 놓고 돌아서는 거 였습니다. 일순, 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얼른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쳐내려 눈물을 땀인 양 만들어 놓고 나서, 아주 천천히 물수건으로 눈동자에서 난 땀을 씻어 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눈물은 왜 짠가



사랑하기 좋은 가을에는 함민복 시 '당신 생각을 켜놓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 라는 표현 하나쯤은 가슴에 간직하고 사랑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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