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는 저녁, 김소월
잠들면 만날런가
잊었던 그 사람은
흰눈 타고 오시네
..
김소월 시 눈 오는 저녁 중에서
눈 오는 저녁
- 김소월
바람 자는 이 저녁
흰눈은 퍼붓는데
무엇하고 계시노
같은 저녁 금년(今年)은……
꿈이라도 꾸면은!
잠들면 만날런가.
잊었던 그 사람은
흰눈 타고 오시네.
저녁때, 흰눈은 퍼부어라
김소월(金素月) Kim So-wol
일제강점기의 시인
본명
김정식(金廷湜, Kim Jung-sik)
호
소월(素月)
본관
공주 김씨(公州金氏)
출생
1902년 9월 7일, 평안북도 구성군 서산면 왕인동
사망
1934년 12월 24일, 평안북도 구성군 방현면 남시리
주요작품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시인으로 일컬어질 정도로 대표작이 많다. 그의 시는 노래로도 많이 만들어져 아직도 불리고 있다.
[ 진달래꽃 ]
[ 엄마야 누나야 ]
[ 산유화 ]
[ 먼 후일 ]
[ 초혼 ]
[ 접동새 ]
[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
[ 차안서선생 삼수갑산운 次岸曙先生 三水甲山韻 ]
[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
김소월 생애
1902년 평안북도 구성군 서산면 왕인리의 외가에서 김성도(金性燾)와 장경숙(張景淑)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란 곳은 아버지의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남단동(현 평안북도 곽산군 남단리)이다.
1904년 아버지 김성도가 친척집에 음식을 싸들고 말을 타고 가던 길에 정주와 곽산 사이의 철도를 부설하던 일본인 목도꾼들이 이 음식을 뺏으려고 김성도에게 달려들어서 마구 구타당해 정신이상자가 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다행히도 목숨은 건졌으나 심한 폭행을 당한 일로 PTSD에 시달리며 음식을 거부하며 집안 사람들과 말을 섞지 않고 방 안에 틀어박혀 있다가 굶어 죽게 되었으며 어린 김소월은 이런 아버지를 불쌍히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경멸하는 양가감정에 휩싸였다고 한다.
이후 김소월의 가족은 광산을 운영하고 있었던 김소월의 할아버지 집으로 이사하는데 할아버지의 훈도를 받고 성장하였다. 아버지가 사고를 당한 직후인 1905년 훗날 김소월의 민요적 어조에 김억과 더불어 큰 영향을 끼친 계희영이 김소월 집안에 김소월의 숙모로 들어온다.
김소월의 숙부는 당시 경성에서 사업을 하고 있어서 자주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았고 남편이 자리를 비워서 홀로 남은 계희영은 어린 김소월을 앉혀놓고 자신이 알던 전래 동화나 민요들을 들려주었다고 한다.
이후 김소월은 사립인 남산보통학교(南山普通學校)를 졸업하고 1915년 평안북도 정주군에 있는 오산학교(五山學校) 중학부로 진학한다. 오산학교 재학 도중인 1916년 할아버지의 주선으로 14세라는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의 친구의 손녀인 홍단실과 결혼한다.
김소월은 오산학교에서 시로서의 스승인 김억과 사상적 스승인 조만식을 만나게 되는데 이는 그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한편 같은 시기 김소월은 오산학교에서 같이 수업을 받던 오순이라는 이름의 여성과 교제를 하게 된다. 하지만 김소월은 이미 홍단실과 결혼을 한 상태였기에 두 사람의 인연은 오순이 19살의 나이로 시집을 가게 되면서 끊어졌고 오순은 의처증이 심했던 남편의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22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고 만다.
이 당시 김소월은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탄식하며 김억에게 배운 시 작법으로 많은 양의 시를 썼는데 이들 시는 훗날 김소월 생전에 낸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에 실려서 김소월의 대표적인 서정시들로 자리잡게 된다. 김소월의 대표시 중 하나인 <초혼>은 오순의 장례식에 참석한 직후 쓰여졌다고 한다.
1919년 3.1 운동의 여파로 오산학교가 문을 닫자 김소월은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학하여 졸업한다.
1923년 일본의 도쿄상과대학(오늘날 히토쓰바시대학)으로 유학을 갔으나 하필이면 입학 직후 관동 대지진과 일본의 잔혹한 한국인 학살 사건이 발생하여 일본 분위기가 흉흉해진 탓에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1924년 도쿄상과대학을 중퇴한 후 귀국한다.
당시 집안이 점점 기울던 김소월의 집안은 가문의 마지막 자존심 겸 집안을 일으킬 마지막 희망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가문의 전재산 절반을 밑천 삼아 가까스로 김소월을 도쿄상과대학에 입학시킨 것이었기에 학업을 다 마치지 못한 아쉬움과 자책감은 김소월에게 평생 한으로 남았다.
귀국 후에 김소월은 스승 김억과 경성에 가서 일자리를 알아보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채 고향으로 돌아온다. 경성에서 김소월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나도향과 친하게 지냈으며 경성에서 구성군으로 돌아오기 직전인 1925년 김소월의 유일한 시집 <진달래꽃>을 김억의 자비 출판으로 출간하였다.
김소월 시인 프로필 자료인용: 나무위키
바람부는 이 저녁 흰눈이 창가에 퍼붓는 마음의 정원에 시를 그리다.